과공비례過恭非禮는 없다
반원익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
기업인으로 오래 살았다. 대기업 입사 추천을 여럿 받은 터라 만류가 있었지만, 도급순위 10위에 불과한 건설사를 택했다. 마흔 다섯에 과장이 될 거냐 사장이 될 거냐는 교수님의 질문에 진로는 쉽게 정해졌다. 무언가를 이끌어 이루고 싶었다. 밤낮없이 일했고, 조금쯤 내세울 만한 성과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온전히 성실하게 뒷받침해 준 동료들 덕분이다. 최연소 무엇, 최초의 무엇은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얻은 인연들, 수십 년 지나도록 안부를 전해오는 소중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보상이다.
세계 인구가 78억 명에 육박했다. 첨단 나노기술, 10억분의 1미터에 불과한 미시의 공간이 경탄을 자아낸다지만, 일상 속 두 사람이 만나는 평범한 확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셈이다. 불교에서는 스치는 인연에도 수천 겁의 시간이 쌓여 있다고 가르친다. 겁은 큰 바위가 백 년에 한 번씩 비단에 닦여 닳아 없어져도 끝나지 않는 시간이다. 외롭고 위태로운 삶의 유한성을 생각할 때, 모든 사람은 그저 있어줘서 고마운 존재로 홀연히 떠오른다. 감사와 배려, 사랑과 평화의 윤리적 당위는 이처럼 단순한 사실에 뿌리를 둔다.
사소한 불만으로 주차장 바닥에 아르바이트생을 무릎 꿇리고, 경적 한 번에 보복 운전으로 생명을 위협했다는 폭력적인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말조차 제대로 못 하는 아기를 밀치고 때리는 어린이집 CCTV 화면마저 자주 대하게 된다.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공동주택에 불을 지르고, 놀라서 뛰어나오는 늙거나 어린 이웃을 잔혹하게 살해한 범죄도 있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학대한다. 안타깝고, 안타깝다. 사람에게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의무와 능력이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연의 고귀함에 대한 인식과 공감을 일깨워야 한다. 송나라 유학자 정자程子는 과공비례過恭非禮를 말했다. 과도한 겸손의 태도가 때로는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속이 빤히 보이는데 지나치게 스스로를 낮추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선거철에만 반짝 지하철 입구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정치인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진심이라면,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인연에 대한 감사를 감출 수 없어 우러난 것이라면, 좀 지나쳐도 괜찮지 않을까. 어른이 아이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통념상 굳이 그러지 않아도 흠 잡히지 않는 관계에서라면 더욱 아름답다. 그렇게 일상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퇴근 후 급한 일이 생겨 통화할 수 있는지 문자로 묻고 답장을 기다리고 있다. 젊은 후배 직원에게서는 아직 회신이 없다. 처한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아무 때나 무턱대고 다이얼을 누르기 보다는 되도록 이런 방식을 고집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과공비례는 없다.